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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리 정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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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풍요로운 기운이 흐르는 곳 

우명리정씨고가(牛鳴里鄭氏古家) 

 

‘소가 우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우명리는 풍수 지리학상으로 보면 소가 편안하게 누워 반추하고 있는 모습의 지세라고 한다.

농사를 지었던 옛날 사람들에게 소는 풍만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이 마을은 예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요롭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중에서도 소의 젖줄 역할을 하는 학자의 집이 있으니 바로 우명리정씨고가다.

 

효자가 많이 나는 마을 

고색 찬연한 기와집이 즐비한 우명리 마을은 그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내력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다른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는데, 효자가 많이 나온 것으로 유명해 효리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학자가 많이 나고, 들이 넓어 살기 넉넉했던 이 집을 마을의 중심이라 여겨 ‘효리댁’이라 불러왔다.

우명리정씨고가를 건립한 정조헌(鄭祖獻) 선생의 아버지 정희운(鄭熙運) 선생과 그를 포함한 아들 네명과 족질 네명을 인솔하여  1728년,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 일어난 무신란에 맞서 싸웠다. 이에 조정은 호조정랑으로 벼슬을 높이고 구충각을 세워 기념하였다.

이처럼 우명리정씨고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신란에 맞서 싸운 아들들의 효와 조국에 대한 충정이 함께 깃든 집이다.

 

성리학 사상이 배어 있는 가옥 

우명리정씨고가는 그 가옥 자체도 1985년 경상남도문화재 민속자료 121호에 지정될 만큼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1720년대 초.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 정희운의 아들 정조헌이 분가해 지은 집이다.

1700년대에 처음건립 후 1800년대에 대문간채와 안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등을 증축해 지금에 이르렀다.

1400여 평의 대지 위에, 앞에는 사랑채가, 뒤에는 안채가 ‘ㅡ’형으로 배치된 이곳은 조선 시대 시골 부농의 가옥답게 안채의 마당보다 바깥마당인 사랑채의 마당이 넓어 활용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또, 유학을 중시한 집안답게 안사랑채와 사랑채 공간을 확실히 구분해 남녀가 사는 공간을 나눴으며, 학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별채를 따로 두었다.

별채의 문틀에 보면 태극문양이 박혀 있는데, 이것은 선조들이 성리학 사상을 따랐음을 보여준다.